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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향(廻向) 등불의 흰 그림자
 

전영일의 등조형과 빛의 미학

                                                                   글 김종길(미술평론가)

 

흰 그림자, 혹은 흰그늘

그의 작업실을 둘러보고 돌아 온 뒤 나는 ‘흰 그림자’에 사로잡혔다. 올해 3월, 갤러리 구루지 기획전으로 치러진 그의 전시 주제는 ‘하얀 그림자’였고 그 전시에 ‘서(序)’의 평을 단 그의 벗 ‘流澎(유팽)’도 윤동주의 ‘흰 그림자’를 인용했다. 나 또한 그의 등 조형을 둘러보고서 생각 난 것이 ‘흰 그림자’였으니 분명히 그 안에 하나의 진리가 있을 게 분명했다.


종이 등은 빛의 그늘이 환하게 밝아야 비로소 하나의 등이 되는 ‘빛박이’의 구조를 가진다. 등의 형상을 구성하는 살들의 구조 바깥으로 종이를 바르되, 그 내부에 빛을 넣고 그렇게 넣은 빛의 그림자가 종이에 밝게 어려야 등불이 된다는 이야기다. 등의 내부에서 빛은 ― 그 빛이 촛불이든 백열등이든 아니면 LED조명이든 상관없이 ― 스스로 밝지만, 그것이 종이 등이 되는 순간은 제 몸을 감추고 흰 그림자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종이 등은 흰 그림자의 형상 속에서만 ‘빛의 미학’이 되는 이중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윤동주가 ‘흰 그림자’에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이라고 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빛은 그늘, 혹은 그림자로 사라지면서 등불이 되기 때문이다. 이때 빛과 그늘/그림자는 둘이 아니다. 빛이 있고 후에 그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사라질 때 하나가 생성되는 ‘빛그늘’, ‘빛그림자’의 순간인 것이다. 전영일의 등에 대한 사유는 그러므로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꿈꾸었던 ‘신명(神明)’의 정신과도 닮았다. 신명은 ‘몸 밝음’인데 그 몸 밝음이 터지는 순간은 ‘한’과 ‘흥’이 서로 구분되지 않고 섞여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몸이 밝다는 것은 몸의 내부가 완전히 ‘빛그늘(日映)’로 충만한 것을 뜻한다. 『삼국유사』에서 빛그늘은 잉태의 순간을 묘사할 때 등장한다. 빛그늘은 생명 창조의 순간이기도 한 것이다. 빛그늘을 ‘흰 그늘’의 미학으로 해석한 이는 시인 김지하다. 그는 2005년 펴낸 『흰 그늘의 미학을 찾아서』에서 활동하는 무(無), 살아 생동하는 창조적 자유, 혼돈의 질서를 통설한다. “빛을 품은 어둠, 뭔가 안에서 큰 외침을 가지고 있는 듯하면서도 자기가 애써 억누르고 있는 침묵이 바로 ‘흰 그늘’”이라는 것이다. 굳이 김지하의 언명이 아니더라도 빛그늘은 흰그늘이며 또한 생동하는 자유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빛/빛덩이로 존재하는 한 말이다.


빛의 형상, 빛덩이의 존재들

빛은 보이지 않아서 스스로 ‘존재’를 밝히기 쉽지 않다. 빛은 생명 현상의 사물들을 드러내고 밝힘으로써 제 몸을 드러낸다. 그런데 오랫동안 동아시아에서 ‘빛의 존재’로 살아 온 한 형상이 있다. 용(龍)이다. 용을 미르, 미리, 미지라고 하는데 ‘미리내’라고 하여 은하수로 부르는 것은 용이 별빛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용은 본래 번개 빛과 같은 것이어서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다. 먹구름을 몰고 다니며 용오름의 현상으로 가끔 제 형상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것이 본 모습은 아닌 것이다.
사람들은 그 빛의 존재를 보고 싶어 아홉 동물의 이미지를 덧입혀서 용의 형상을 그려냈다. 용의 머리는 돼지 코와 토끼 눈, 낙타의 머리, 영주 털, 사슴 뿔, 소의 귀로 그려진다. 뱀의 몸에 잉어의 비늘과 큰 조개를 그린 것이 용의 몸이고, 호랑이 주먹에 매의 발톱을 그린 것이 용의 발이다. 이 용의 상징은 ‘미르-미륵’으로 이어져서 부처와 만나고 사슴 뿔의 상징에서는 북방 샤먼들의 굿과 이어진다. 북방 샤먼들은 사슴 뿔 관을 쓰고 북을 치며 노래하는 것으로 굿을 펼쳤다. 석가모니 부처가 녹야원이라는 ‘사슴벌’에서 첫 설법을 펼친 것은 그가 곧 ‘사슴샤먼’이었기 때문이다.
부처는 ‘깨달은 자’를 뜻하는데 우리말로 바꾸면 ‘얼 깨운 자’다. 깨닫는다는 것은 얼을 깨우는 것과 같다. 그리고 ‘얼’은 ‘한 얼’로도 이야기하듯이 ‘크게 밝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빛의 존재로서 ‘용의 존재’들은 신비한 동물이 아니라 ‘밝게 빛나는 이’들을 가리킨다. 전영일이 빚은 빛의 형상들은 그런 ‘빛덩이’존재의 원초적 형상들이다.
<빛이 머물다>와 <조용한 확산> 연작은 태곳적 빛덩이 형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등불 조형의 탄생

전통등의 형상에서 ‘등조각’이라는 조형 실험을 동시에 시도하고 있는 전영일의 등조형 작품들은 그 형상이 인간이든, 종이든, 연꽃이든 상관없이 모두 ‘용의 존재’형상으로서의 의미를 획득한다고 할 수 있다. 빛의 존재를 그려내기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이 ‘(어떤) 형상들’이기 때문이다. 빛의 형상들은 모두 동일한 등의 구조들에 의해 탄생한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하나의 형상들이 모두 동일한 상징성으로 묶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 빛형상이 뜻하는 상징과 비천상을 연꽃으로 바꾼 종형상의 상징을 어떻게 같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가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 형상들이 보여주는 ‘형상성의 미학’보다 먼저 ‘등’과 ‘불’의 ‘등불’로서의 미학일 것이다. 나는 그가 2015년에 기획한 청계천 전통등 전시회 <일상에 존재하는 깨달은-廻向>에 주목해서 작품들을 보았다.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들은 쉽고 간결한 그야말로 ‘일상적 주제’의 작품들이 주를 이뤘다. 그런데 왜 그는 ‘회향’이라는 제목을 내세웠을까?
‘회향’은 스스로 쌓은 공덕을 타인에게 돌려서 자타(自他)가 함께 극락왕생 하자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에서 회향은 법회로도 하고 독경으로도 하고 염불로도 하고 보시로도 한다. 그런데 전영일은 그 회향의 방식을 ‘등불 밝힘’의 전시회를 통해서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등불을 ‘이타(利他)의 빛’으로 밝히려는 그의 정신이 돋보인다. 대승불교에서는 ‘이타가 곧 자리(自利)’라고 말한다. 세상을 밝히는 것이 곧 ‘나’를 밝게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바로 그것이 전영일이 추구하는 회향(廻向) 등불로서의 흰 그림자요, 빛의 미학일 것이다.